[에세이] 권력이 있는 곳에
문이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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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 2019-01-14 10:06본문
1761년 초 현직 좌의정과 우의정, 전직 영의정 등 정1품 정승들이 음독자살한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영의정을 지내고 영추부사 이천보는 세자의 일로 영조의 인책이 있자 1761년 1월 5일에 음독자살했다.
좌의정 이후는 1760년에는 좌의정이 되었고, 세자의 스승으로 임명되어 세자의 일로 인책을 당하자 1761년 3월 4일에 음독자살했고, 우의정 민백상 역시 세자의 일로 인책을 당하자 1761년 2월 5일 음독자살했다.
세자는 전대 임금인 경종 때 노론이 일으킨 신임사화를 비판하며 당시의 노론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세자와 유대가 깊었다.
세자는 1749년부터 영조를 대신해 국사의 상당부분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세자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조의 척신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불확실한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세자의 실수나 실책을 끊임없이 영조에게 이간질했다.
성격이 급한 영조는 여러 차례 심하게 꾸짖으니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얻게 되었다. 세조에 대한 영조의 불신은 극에 달하고 세자를 옹호하던 대신들에 대한 인책이 심해지자 결국 세 사람은 죽음을 택하게 된 것이다.
영조는 당파싸움에 진저리를 낸 나머지 탕평책을 썼다. 당시 집권 당파는 노론과 소론이었는데, 영조는 자신의 의지에 찬성하는 사람을 주요 직책에 임명하면서 영의정에 노론을 임명하면 좌의정에는 소론을 임명하여 권력의 균형을 꾀했다.
개혁 초기에는 자신의 탕평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노론의 힘을 빌리면서 혼인관계 등을 통해 척신(戚臣:외척관계에 있는 신하)을 만든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사도세자가 영조 대신 정무를 볼 즈음에는 척신이 이미 당파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정국이 태풍권으로 진입했던 것이다.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되면서 부원군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금위대장이 되었다.
또, 김한구의 아들 정순왕후의 오빠 김구주가 척신으로 사도세자를 모함하는데 가담했다. 이외에도 김한록, 김상로, 홍계희 등도 세자를 모함하는데 동참했다.
1749년 사도세자가 정무를 관장하게 된 후 이들 척신들은 기회만 있으면 세자를 무고했는데, 그들은 좀 더 왕의 귀에 가까이 가기 위해 영조가 총애하는 후궁 문소의와 화완옹주까지 이용했다. 화완옹주는 영조의 12명의 딸 중 아홉째 딸이다.
영조가 화완옹주를 총애하자 권신들은 그녀에게 몰려들어 왕에게 청할 것을 그녀에게 대신하게 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녀를 ‘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했다.’고 기록했다. 그녀가 권신들과 가까이 하며 권력을 탐했는데 그로 인해 오빠 사도세자와 사이가 벌어졌다.
사도세자가 1761년 4월 영조 몰래 20여일을 평양에서 놀다 온 사건으로 영조에게 극단적으로 미움을 받게 되었다. 사실은 화완옹주가 사도세자를 위하는 척 하면서 여행을 가게 한 다음, 왕에게 그 사실을 일러 바쳤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세 살에 효경을 외우고 일곱 살에 동몽선습을 뗄 정도였다고 한다. 열 살 때는 노론 척신들을 비판 할 정도로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총명하다고 해도 수 십 년 권력 싸움에 이골이 난 척신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척신들은 1762년 5월 나경언이라는 청지기를 시켜 ‘세자가 반역을 꾀한다.’는 거짓을 고하게 했다. 크게 노한 영조는 다음 달(윤5월)에 뒤주 속에 가둬 죽였다. 권력이 있는 곳에 피가 있다. 정1품 재상 세 명이 동시에 자살한 전무후무한 사건의 배후에는 이처럼 치열한 권력싸움이 있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라이벌이였던 항우를 쓰러뜨리고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도, 유비가 난세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인재를 얻고 인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조선시대 당파싸움 또는 척신들의 권력 다툼에 희생 된 사도세자는 물론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 그들이 휘두른 당시의 권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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