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욕심의 종말
문이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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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 2019-04-26 13:48본문
수나라 문제(文帝)는 황후 독고씨와 사이에 다섯 아들을 두었다. 보기에는 부부금술이 좋아 보이나 사실은 독고씨의 질투가 심해서 후궁을 두지 못했을 뿐이다.
첫째 아들 양용은 통이 크고 호인이었다. 첩도 많이 거느려 조강지처를 화병으로 죽게 했다. 이런 점이 가뜩이나 첩질하는 남자를 증오하던 어머니 독고 황후를 자극했고, 음주가무를 즐기던 양용의 취미는 아버지 문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둘째 양광은 자신을 위장해 가며 황제와 황후를 속이고 형 태자 양용을 모함했다. 양광은 자신의 처소에 먼지가 가득한 거문고를 가져다 놓고 노복도 모두 늙고 못생긴 사람들로 두어 황제와 황후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또 황제 주변의 사람을 매수하여 정보를 입수했다.
황제와 황후의 마음은 갈수록 태자 양용에서 멀어졌고, 상대적으로 양광에 대한 호감은 더욱 커졌다. 상황을 주시하던 권신 양소는 마침내 양광과 손을 잡고 적자의 자리를 빼앗는 이른바 ’탈적(奪嫡)‘ 투쟁에 뛰어 들었다.
양소는 수왕조가 수백 년에 걸친 남북조시대의 대혼란을 수습하고 천하를 재통일하는 과정에서 군공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개국 후에는 권력을 떨쳤다. 또한, 양소는 명장, 권신, 간신의 면모를 모두 갖춘 다중 인격체로서 ‘시대의 기형아’로 불린다.
황제의 심기를 파악한 양소는 황제 앞에서 태자 양용의 흠을 지적했다. 서서히 태자 폐위문제가 불거지자 중신 고경은 태자 폐위는 부당하다고 극구 반대했다. 이리하여 양소는 황후와 고경 사이를 이간질하고, 황후는 다시 황제와 고경 사이를 이간질하여 결국 고경을 모반으로 몰아 조정에서 몰아냈다.
고경의 추천으로 조정에 들어 온 양소가 고경을 제거한 것이다. 마침내 태자 양용도 모반이란 죄명을 쓰고 평민으로 강등된 채 궁궐 깊은 곳에 감금당했다. 2년 뒤 황후가 세상을 떠났다.
황제 문제가 604년에 인수궁으로 피서를 갔다가 병으로 눕고 말았다. 병세가 심각해지자 문제는 둘째 양광을 불러 간호를 하게 했다. 이제 황제 자리는 떼놓은 당상인 상황에서 양광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아버지가 총애하는 진(陳)부인을 화장실에서 희롱했다. 놀란 진 부인이 문제에게 달려와 이 사실을 알리자 문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양광을 소환했다. 놀란 양광은 양소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양소는 일단 황제가 양광을 소환하려 보낸 관리를 잡아두게 한 다음, 인수궁을 포위하고 외부와 연락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이어 양광의 부하 장형이 황제 문제를 질질 끌고나와 사정없이 공격하여 황제는 피를 토하며 즉사했다.
아비를 죽인 양광은 자신이 희롱한 아름다운 서모 진부인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장안에 감금되어 있는 형 양용을 사람을 보내서 죽였다. 그리고 황제 양제가 되었다.
양소는 재산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긁어모았고, 사치와 방탕은 말로 할 수 없었으며, 자신을 시중드는 가동과 처첩, 노비와 기생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결국 양소는 수 왕조의 유일무이한 재상이 됨으로 신하로서의 최고 자리에 올랐다. 황제의 권력을 능가 할 양소는 결국 자기가 도와준 양제에게 독살된다. 그리고 양제는 우문화급에게 살해되었다.
양소를 기용한 수 황제 문제는 결국 자기가 기용한 신하 양소에게 죽고, 양소 또한, 자기의 노력에 의해 황제가 된 양제에 의해 죽었다. 가까스로 천하를 재통일한 수왕조가 불과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멸망한 것도 통치자가 양소를 기용한 때문이고 권력자의 방심에 틈을 보이는데 있다.
양귀비는 화려한 자태를 뽐내지만 독성이 매우 강하여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입힌다. 그래서 성경말씀에는 영혼을 위협하는 선지자나 거짓 교사의 악한 교훈을 지칭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된다. 나라를 발전시키고 부흥시키는 데는 충직한 신하 열 명도 모자라지만, 나라를 망치는 데는 한 명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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