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처구니없는 상황
문이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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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 2019-05-24 16:35본문
식민지 조선 정부의 꾸준한 관리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통치기간 내내 성병이 조선에서 심각한 사회문제를 나타났다. 성병은 1920년-30년대 결핵, 소화기병과 나란히 조선인을 괴롭히는 대표적인 질병이었다.
1928년 <동아일보>는 ‘화류병 환자’의 수가 조선 청년 인구의 50% 이상이라는 추정치를 내놓기도 했다. 당시의 이러한 심각한 상황은 1933년 <조선일보>에 실린 ‘평안북도 신의주’의 “일대 아수라장”에 대한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신의주‘의 한 제지공장에서 원목을 유해한 과정에서 사용된 유황과 양잿물(수산화나트륨)등의 약품을 압록강으로 흘려보내기 위해 하수도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이 하수도에서 나오는 폐수가 임질과 매독 등 각종 피부병에 약효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인근 주민뿐 아니라 타지의 환자들까지 몰려들어 매일 300명 정도의 사람들이 공장의 하수도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치병소동이 경찰서 위생과에서 풍기상의 문제로까지 이어져 소관 경찰서는 ‘풍기단속’을 명목으로 경관 한 명씩을 매일 현장에 파견하는 한편, 총독부 위생과에 샘플 분석을 의뢰하여 폐수의 의학적 효과를 규명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미 ‘살바르산’이 매독치료제가 발명되었고, 의학적으로 성병치료법들이 획기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치료비는 빈곤한 조선인 일반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비쌌던 것이었다.
치병소동에서 보여주듯 여전히 많은 사람이 치료를 위해 미신적이고 불확실한 민간요법에 의지 했다. 성병이 확산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식민지 정부의 성병예방책이 성매매 여성의 강제 검진에만 제한되어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없었고, 정부관리의 영역을 벗어난 사창이나 밀매음에서 높은 전염률은 막을 수는 없었다.
1933년 <동아일보>는 ‘십팔 세 소부 방화광. 성적관계의 방화’라는 제목으로 5개월 동안 상습적으로 방화를 저지는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5월에서 10월까지 이어진 방화는 추석을 앞둔 5일간 매일 10-30분 간격으로 이어져 동내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57회에 달하는 잦은 방화 때문에 주민들은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경찰은 필사적으로 검거에 노력했지만 오리무중이었으며 그 동안 불을 끄기 위해 동원된 인원만 5천명에 달했다. 주민들은 이 불을 ‘귀신 불’이라 불렀다.
어느 날 순찰 경찰이 처마에 불을 놓고 있던 범인을 발견하고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 바로 그 집주인이자 결혼 1년차인 18세의 어린 소부인 것으로 드러났다. 57회에 달하는 방화는 모두 그녀의 집과 인접한 이웃집 두 채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방화범인 그녀는 가정경제가 넉넉했지만 남편이 1년이 넘도록 ‘생식기능이 전혀 없어’ ‘히스테리의 발작을 일으킨 탓’ 으로 실제로 남편에 대한 성적 불만을 품은 아내가 이혼을 당하기 위해 57번 방화를 했다.
당시에 이와 유사한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철창에 우는 여자’ 남편이 성불구자임을 알고 비관 끝에 이혼할 계획으로 자기 집에 불을 지른 새댁. 히스테리에 사로잡힌 기혼 여성들의 불만족스러운 성생활로 병들게 된 여성들. 즉 생식기성 신경쇠약 남편의 아내들로 그려졌다.
1922년 조선민사령 개정을 계기로 조선에서도 협의이혼과 여성의 이혼청구권이 명문화되었다. 제도가 정비되는 과정부터 이혼은 폭발적으로 증가해 1917-18년에 1만 건을 넘을 정도였고, 특히 여성들의 청구가 두드러졌다.
1910년대 경성지방 법원 이혼소동은 아내가 남편을 상대로 제기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에게는 이혼소송은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었다. 특히 남편이 이혼을 거부하여 협의이혼을 할 수 없을 경우 더욱 그랬다. 방화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법 밖에서 발견한 살인 다음의 선택이란 것이다.
요즘은 어떠한가. 모자람 없이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유명 연애인의 '몰카' 카톡방 유포 사건과 마약사건 등이 성행하여 사회를 혼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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