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함부로 부리지 말라
문이주 취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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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 2019-09-20 14:35본문
신정왕후는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로써 12세에 간택되어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부인으로 세자빈이 되었다. 세자빈 조씨는 행복했고, 19세에 세손인 헌종을 낳았다. 총명한 효명세자가 21세 나이로 죽자 과부가 되고 말았다.
조씨가 낳은 아들은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834년(순조34)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으니 조씨는 왕비가 되지 못하고 대비가 되었다. 여덟 살의 어린 아들이 왕이 되었으나 수렴청정은 왕실의 가장 어른인 시어머니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가 맡게 되었다. 순원왕후 김씨는 김조준의 딸로서 안동김씨 60년 세도의 기틀을 다진 여인이었다.
헌종이 즉위하면서 김씨와 조씨가 치열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다. 그러나 순원왕후 김씨가 가장 큰 권력을 가졌기에 안동김씨 가문의 여식을 헌종의 부인 효현왕후로 삼았다. 하지만 그녀는 16세에 요절하자 왕후자리를 놓고 김씨와 조씨가 치열하게 다투다가 남양홍씨 홍재용의 딸을 헌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간택함으로 두 세력은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헌종이 22세에 딸 하나를 남기고 죽으면서 강화도령 철종이 18세 나이로 즉위했다.
강화도에서 출생하여 농사나 짓던 원범이 왕위에 오른 것도 세도를 잡고 있던 안동김씨 가문이 허수아비 왕을 앞세워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철종은 안동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철종시대의 나라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신음했다. 매관매석이 횡행하여 안동김씨의 좌장격인 김좌근의 애첩 나합(羅閤:나주출신의 합하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의 치마속에서 벼슬이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김좌근을 비롯한 안동김씨 세력은 종실과 풍양조씨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안동김씨에게 비판적이었던 종친 이하전을 역모로 몰아 살해한 것이었다. 이하전은 이시인 아들로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족 중 학문이 높고 기개가 있었다고 왕위 후보에 올랐으나 안동김씨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하전은 철종 14년(1862) 오위장 이재두의 무고로 김순성, 이긍선 등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역모 혐의를 받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인물이었기에 야심도 정치력도 없었다. 철종은 병치레를 자주하면서 후사문제가 대두되었다. 철종은 숙의 범씨와의 사이에 옹주 하나 밖에 없었고, 옹주는 박영효에게 시집을 갔다. 순조 이후 왕손들은 단명했기에 왕실에는 가까운 종친들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철종도 헌종과 칠촌이 되었기에 왕이 될 수 있었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명실상부한 척신정치를 실행한 안동 김문의 서슬 아래에서 이하응(훗날 대원군)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곤경에 처했고 생활은 비참해지고, 종친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철종은 첫 왕자를 낳았으나 이 왕자는 돌도 지나기 전에 죽었다. 철종은 방탕한 생활로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여러 차례 위급한 지경에 빠졌다가 회복되곤 했다. 철종은 기력이 회복되어 정사를 돌보려하면 안동김씨 대신들이 약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후궁의 치맛자락에서 세월을 보내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니 끝내 병을 얻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안동김씨의 수난 속에서 견디어 온 신정왕후는 효명세자의 유업을 달성하기 위해 흥선군 이하응과 손잡고 고종을 즉위시킴으로써 안동김씨의 집권세력은 물러가고 풍양조씨 세상이 되었다.
명심보감에 ‘복이 있다 해도 다 누리지 말라. 복이 다 하면 몸이 빈궁해 질 것이요. 권세가 있다 해도 함부로 부리지 말라. 권세가 다 하면 원수와 서로 만나게 된다. 복이 있거든 항상 아끼고, 권세가 있거든 항상 스스로 겸손하라. 사람에 있어서 교만과 사치는 처음은 있으나 나중은 없는 것이다.’ 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