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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상이 남긴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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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 2020-07-1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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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주 기자 = 역사는 승자가 쓴다. 그래서 역사는 쓰는 순간부터 왜곡을 피할 수 없다.

​지금 역사를 쓰는 사람들도 열심히 집권자들의 치부를 감추고 있고 역사책을 읽는 사람들 또한 그 치부를 보는 것을 원치 않으니, 둘 다 역사 왜곡의 공범이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록은 굴절된 거울과 같아 우리 모두의 가치관을 왜곡시킨다.


조선보다 몇 십 년 앞서 개국한 명나라는 조선인의 조상보다 더 우대 받는 나라가 되었다. 조선은 전 분야에 걸쳐 명나라를 그대로 모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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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정통성의 필요성 때문에 명을 상국으로 모시기로 스스로 맹세한 나라였다. 그래서 외교권과 군사권을 바치고 평화를 살 수 있었으니 이후 명의 무수한 횡포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는 조선이 안일과 나태에 빠지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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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요구에 따라 생산되는 말(馬)을 전부 바쳐야 했고, 모든 제도를 명의 방식대로 따랐다. 그 뿐만 아니라 개국 이래 처음으로 나라 이름까지 명에게 물어서 결정했다. 명은 조선에 금, 은, 말, 처녀를 조공으로 요구했으며 조선은 이를 조달하기 위해 매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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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에 이르러 조선에 금과 은의 생산량이 보잘것없다는 점과, 인륜상 차마 할 수 없는 처녀 조공의 어려움을 호소하여 물목을 인삼으로 바꾸어 조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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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을 바치는 답례로 명에서는 비단, 서적, 문방구, 약재, 도자기 등을 받았다.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후 국호를 정해야 하는데 이를 명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다.

​조선에서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 둘 중 하나를 요청하자 ‘조선(朝鮮)’으로 결정하여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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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사신이 조선에 오면 왕이 수창 궁에서 무릎을 꿇고 황제의 글을 받을 정도로 명이 멸망한 후에도 조선 왕조 500년 내내 계속되었다.

​이 같은 명과 청에 대한 사대(작고 약한 나라가 크고 강한 나라를 섬김)의 결과가 고인 물이 되면서 역동성을 잃고 줄곧 쇠퇴의 길로만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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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국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두문동에 불을 질러 많은 고려의 충신들을 화장하고, 고려 태조의 후손인 왕 씨들을 바다 속에 밀어 넣어 수장시킨 일 등을 잘 알고 있었던 명은 조선의 개국 세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조선에서 조공이란 이름으로 물량 공세를 펴자 누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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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명으로부터 ‘왕’이란 호칭을 들어 본 일도 없고, 태종 때에 가서야 왕으로서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 명에 보내는 서신만 해도 정월 초하루에 하정사, 황제 생일에 성절사, 황태자의 생일에 천추사, 고마운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사은사, 급한 일을 알리는 주청사, 황실 경사 때 보내는 진하사, 황실에 불행한 일이 있을 때에 보내는 진위사 등이 있었다.


국가의 지배층인 왕과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이처럼 굽실거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일반 백성들에게 한 없이 잘난 척하고 수탈을 일삼았으니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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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죽고 난 후대 왕이 작성하게 되는데 사관들의 사초와 관상감 일기, 춘추관 일기, 승정원일기 등을 참조하여 편찬했다. 완성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봉안식을 올리고 사고에 보관하게 되는데 편찬 후에도 공정성을 보장받기 위해 왕은 볼 수 없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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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록들은 형식상 매우 공정을 기한 것 같지만 후대 왕의 영향력이 컸고 당시 사관이나 실록 편찬자가 어느 당파에 속하느냐에 따라 정 반대의 자료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실록이 쓰인 후 ‘수정실록’이라는 이전의 실록 기록을 부정하는 괴상한 책이 여러 번 등장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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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죽은 후에 편찬되고 당대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지만 연산군만 이를 보았다. 처결된 결과에 대한 사관의 생각이나 평가가 기록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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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승정원일기는 아무나 어느 때나 꺼내 볼 수 있는 공개된 문서였다. 승정원일기에는 왕의 잘 잘못에 대한 평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왕 옆에는 왕의 언행이나 신하들의 발언, 그리고 상소 내용을 기록하는 사관과 주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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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벼슬을 팔았다. 벼슬을 판돈이 국가 재정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민비와 고종의 비자금, 그리고 대부분이 민씨들의 사복을 채우는데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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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같은 데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치부 중 치부를 살펴보면서 우리 조상들이 남긴 발자국이이기에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고, 인간이 이처럼 추하고 비열해 질 수 있음을 마음속으로 깊이 내성하고 경계해야 할 일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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