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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천륜마저 저버린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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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 2020-08-27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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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주 기자 = 인조는 재위 27년(1649년) 5월 8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호는 열조(烈祖)였으나 인조(仁祖)로 바꾸었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고, 아버지로서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할아버지로서 손자들을 죽인 인물에게 어질 인(仁)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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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는 음양이 공존한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도 마찬가지였다.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샬을 만나 성리학의 다른 사상과 세계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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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더 이상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는 조선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개방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이었기 때문에 양자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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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와 세자빈 강빈은 전운이 감돌던 인조 14년(1636년, 병자년) 3월에 원손을 낳았고, 그 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세자는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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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 뒤 후금과 조선은 형제지국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해마다 음력 시월에 중국에 가는 사신이 가지고 가던 공물)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 사상으로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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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늘려 금 100냥, 은 1천 냥, 각종 직물 1만 2천필, 말 3천 필 등과 정병(正兵) 3만 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측은 세폐를 대폭으로 감액하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그 다음 달에는 후금으로부터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고 요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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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절화(絶和)하는 한편 군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해졌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마부대 등이 인조비 한씨의 조문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義)를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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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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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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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병자호란이 발생하였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는 의식을 치르며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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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은 강화 대표로 세자를 인질로 요구하므로 협상의 큰 걸림돌이었으나 세자 자신이 인조 15년 1월 22일 “일이 너무 급박해졌다. 나에게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라며 인질을 자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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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 4월 세자는 개국 이래 처음 인질로 끌려간 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인조 23년(1645년) 2월 소현세자는 만 8년 만에 영구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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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전인 인조 22년 정월 장인 강석기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아버지인 인조가 냉담하게 대했을 뿐 아니라 왕곡(往哭)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인조는 세자가 청의 힘으로 국왕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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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귀국 후 두 달 만에 학질에 걸려 병석에 있다가 사흘만에 급서했다. 서른네 살의 건장한 세자의 급서는 독살설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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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검은 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와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인조실록]의 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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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 이형익을 비호했고, 세자의 장례도 박하게 치렀다.

세자의 후사도 종법(宗法)에 따른 원손마저 폐위하고 봉림대군(훗날 효종)으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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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강빈에게 누명을 씌우고, 강빈과 어머니와 두 오빠를 제거 했다. 그리고 인조의 손자 세 명도 귀향지인 제주도에서 결국 죽고 말았으니 어찌 천인공노 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시대적 착오가 쿠데타가 가족참살로 이어져 조선 역사의 가장 부끄러운 오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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