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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王도 양반들은 무섭다
문이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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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 2020-10-2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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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목면으로 만든 잠옷을 입었으며 이불도 명주로 만든 것을 덮었으며 병풍도 진설하지 않았다.


영조의 검소함이 민간의 부잣집만도 못했다는 것이다. [영조행장]에는 ‘중의, 철릭(군복) 따위는 빨고 기워 입고 겨울에는 춥더라도 갖옷을 입은 적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


영조 즉위 8-9년 동안 흉년과 전염병이 만연해 백성들이 죽어 가는데도 사대부들의 사치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재위 9년 영조는 가뭄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사치는 위에서부터 본받게 되므로 왕실의 고급 비단 직조를 금지했다.


재위32년 1월에는 사대부가 부녀자들의 가체(어여머리)를 금지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명했다.


[영조실록]은 이때 사대가 부인들이 서로 높고 큰 가체를 자랑하고 숭상했다며 한 번 가체를 하는데 몇 백 금을 썼다고 했다.


영조는 금주령도 자주 내렸는데, 재위 31년에는 제사 때 술 대신 식혜를 쓰라고 명하고 자신도 금주했다.


절검생활을 함으로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한다고 여겼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모순된 제도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역의 폐단이었는데, 그 핵심은 양반들이 군역에서 면제된 것이었다.
개국 초에는 양반 사대부들도 군역의무가 있었으나 차차 사라져 중종 36년에 군적수포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은 군역에서 합법적으로 면제되었다.


양반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1년에 포 2필을 납부하는 것으로 군역의무를 대신했는데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 되었다.


돈 많은 농부들은 곡물을 헌납하고 공명첩(空名帖:이름을 적지 않은 백지 임명장)을 사들여 양반신분을 획득하여 군역을 면제 받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힘없고 가난한 상놈들만 군역을 감당해야 했으니 더욱 문제가 커졌다. 임진왜란 때 훈련도감을 창설한 이래 이괄의 난을 계기기로 어영청, 경기 일대의 방위를 위한 총융청, 정묘호란 뒤에는 남한산성에 수어청, 17세기 말에는 수도방위를 위해 금위영이 설치됨으로써 군영이 5개로 늘어남으로 군포를 납부할 백성의 수는 줄어드는데 국방비 사용처는 늘어나게 되었다.


해결책은 양반집안에서도 군포를 받자는 호포론과 양반 사대부 개개인을 징병 대상으로 삼아 돈을 받자는 구전론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가난한 백성들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양반 대다수가 반대하자 군제개혁론은 좌초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영조26년에 호조판서 박문수가 호전론을 제기하면서 다시 양역변통 논쟁이 붙었다. 영조는 재위 26년에 홍화문에 나가 직접 백성들을 만나 군역에 관한 여론을 들었다.


백성들의 눈물어린 하소연을 듣고 “백성들이 부르짖고 원망하여 도탄 속에 있어도 구해내지 못하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조들의 영령을 대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영조가 타협안으로 왕실과 지주가 조금씩 양보해 백성들의 군포 부담을 줄이자는 균역법 방안이었다.


백성들의 부담을 연간 군포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대신 줄어든 수입은 어염선세(漁,鹽,船), 결작미(結作米), 은여결세(隱餘結稅),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등으로 보충하자는 방안이었다.


어염선세는 왕실에 속해있던 수입을 정부 재정으로 돌린 것으로 왕실이 양보한 것이고, 결작미는 토지 1결당 쌀 2두(혹은 돈 2전)를 부과 징수하는 것으로 양반 지주들이 조금 양보하는 것이다.


선무군관포는 여러 방법으로 군역에서 벗어난 양민들을 색출해 선무군관으로 편성한 것으로 전국에서 24,500여 명이 새로이 편입되었다.


그러나 균역법은 군역 목표였던 양반들의 과세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지배층의 부분 양보를 명분삼아 문제의 본질을 덮어버린 반쪽짜리 개혁에 불과했다.


양반들의 결작미 부담은 소작민에게 떠넘겨졌고, 농민 부담은 다시 가증되었다. 균역법 시행이 2년도 안된 영조28년(1752년) 병조판서 홍계희가 대리청정하는 사도세자에게 올린 보고서는 반쪽짜리 개혁안이 휴지 조각이 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홍계희는 “가장 가난한 백성들만 군포납부 의무를 진다. 이들은 남의 전토를 경작하여 경작의 반을 지주에게 주고나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비록 날마다 매질을 가하더라도 바칠 수 있는 계책이 없기에 결국에는 죽지 않으면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조실록 28년 1월 13일]


영조가 진정한 애민군주가 되려면 절검이란 개인적 수신보다는 양반 과세를 통한 신분제의 해체라는 제도개혁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경종 독살설에 발목을 잡힌 영조는 양반 사대부의 특권을 철폐할 권력과 의지도 없었다.


양반 사대부의 특권에 영조도 “양반들의 나라이니 경들이 다스리시오” 라고 할 정도니 양반들의 주권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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